그 시절, 배경은 그냥 배경이었다
1950년대, 전쟁이 막 끝난 한국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기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죠. 말 그대로 배경은 ‘그냥 배경’이었고, 스토리를 채우기 위한 공간에 불과했습니다.
막난이비사 (1955)
하지만, 전쟁의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던 한국의 변화 속에서 프로덕션 디자인 역시 천천히 자기 색깔을 찾아가기 시작했죠.
그러다 1980년대, 경제 성장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늘어난 예산과 창작의 자유 덕분에 단순한 배경이었던 디자인이 이야기를 이끄는 중요한 주역으로 자리 잡았으니, 이쯤 되면 진정한 역변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깊고 푸른 밤 (1985)
뉴 웨이브, 쓰나미가 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 뉴 웨이브’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파도가 아니라, 창의력의 쓰나미였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같은 작품들이 바로 이 시기의 산물입니다. (잠깐, 이 두 영화의 세트를 담당한 곳이 우리 NSN이라는 사실! 살짝 자랑 좀 하겠습니다.)
살인의 추억 (2003)
이제 프로덕션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게 꾸미는 걸 넘어, 작품의 감성과 분위기, 상징성을 책임지는 핵심 요소로 거듭났습니다. 캐릭터의 내면을 드러내고, 관객들에게 화면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진 거죠.
그리고 오늘날, 한류(Hallyu)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한국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이제 작품 자체만큼이나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구슬치기 게임 골목길 세트와 거대한 돼지 저금통처럼 세트가 작품의 또 다른 주연으로 자리 잡으면서, 관객들에게 “저거 만드는데 얼마나 들었을까?”라는 감탄을 자아내고 있으니까요.
오징어 게임 거대한 저금통
영화 관람, 일상이 되다
한때 영화는 특별한 이벤트였습니다. 친구들과 극장에 가거나, DVD 플레이어를 가진 친구네 집에 모여 영화를 보던 시절을 기억하시나요?
그런데 2000년대 후반, 스트리밍 플랫폼이 등장하며 영화 관람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사람들은 디즈니 클래식과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모두 보기 위해 여러 플랫폼에 구독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콘텐츠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 프로덕션 디자이너들의 예산도 늘었을까요? 아쉽게도, 현실은 달랐습니다.
대작들은 막대한 예산을 자랑했지만, 대부분의 제작 팀들은 줄어든 예산과 빡빡한 일정 속에서 일해야 했죠. (동물 농장의 조지 오웰의 말이 떠오르네요: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이 업계에서도 “더 평등한 작품”들은 유리 다리를 세울 예산을 가져갔고, 나머지는 유리 테이블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 이제는 경계가 없다
여러분은 영화파인가요, 드라마파인가요? 한동안 한국에서는 영화가 더 예술적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영화는 고상한 예술, 드라마는 상업적 콘텐츠라는 편견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오징어 게임이나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처럼 영화 못지않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드라마들이 등장하면서, 드라마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영화에서만 활동하던 베테랑 제작자들도 드라마로 발길을 돌리고 있죠.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2024)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지금, 다음 왕좌의 게임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앞으로의 기대
전 세계를 사로잡은 한국 콘텐츠의 중심에는 언제나 프로덕션 디자인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스릴 넘치는 스릴러든, 장엄한 역사극이든, 혹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디스토피아든, 프로덕션 디자이너들은 우리를 계속 스크린 앞으로 끌어당기며 “어떻게 저걸 만들었지?”라는 감탄을 멈출 수 없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스스로 이렇게 말하게 되겠죠. “역시, 한국 프로덕션 디자인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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